진주강씨 시조인 강이식 무덤을 중국이 없에버렸다? 가짜뉴스?

강이식(姜以式)은 진주 강씨의 시조이다. 진주강씨 족보에는 고구려 영양왕 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역임한 장군이라고 하나, 중국에 영향으로 쓴 《삼국사기》, 《구당서》(舊唐書) 등 정사(正史)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있는 삼국사기가 거짓이라고? 에이 말도안되 니가 몰 알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수서를 인용한 책이다. 여기에서는 강이식 할아버지에 수군이 장마나 전염병을 만나서 침몰하고 풍파를 만나 저절로 무너진 듯이 그려놓고 있다. 지금도 동북공정 때문에 한복이 중국옷이라고 하는데 송나라 시기라고 동북공정이 없었겠느뇨? 대국의 검열에 맞춰야 하는 압박감으로 김부식은 그당시에 진실을 진실로 기록하지 못하고 수서 인용에 그쳤던 것이다. 김부식은 고구려 멸망 뒤,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필법을 사용했다. 신라의 시득장군은 당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해전을 통해 당선을 격퇴시켰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 에서 병선들이 풍랑으로 저절로 침몰한 듯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차라리 중국의 포털사이트인 바이두 에서 강이식 을 입력해보자.

https://tieba.baidu.com/p/2806130004

598年,平阳王联合靺鞨先发制人攻击隋在河北的军事驻地后,隋文帝派他小儿子杨谅协高颎和前陈国大将周罗睺率30万海陆大军攻打高句丽。 杨谅的军队去时正赶高句丽的雨季。大雨使杨谅的军队前行和物资供应变得艰难。高句丽的频频袭击使杨谅的军队损失惨重。感到无法攻克高句丽,杨谅决定与周罗睺的海军会合。周罗睺的海军同时也是困难重重。虽然隋的海军尽可能地靠着海岸前行,但海上的大浪使许多船只颠覆。隋的海军一抛锚休息,高句丽的先遣部队就会出现进行袭击。周罗睺和姜以式的5万高句丽海军在渤海交锋。由于周罗睺先前已损兵折将,元气大伤,大败于高句丽。据《隋书》记载,这次战役中,隋军损失90%。而与隋相比,高句丽军队伤亡很少。

598년, ‘평양왕과 연합한 말갈이 먼저 수의 하북성 군사주둔지를 공격했다.’ 수문제는 막내 아들 양량과 주나후에게 30만 수륙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했다. 양량의 군대가 갔을 때 고구려는 장마철이었고, 큰 비로 인하여 진군과 물자공급이 어려웠다. 고구려의 잦은 공격으로 인하여 양량의 군대는 비참하도록 크게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를 이길수 없다고 판단한 양량은 주나후의 수군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주나후의 수군도 동시에 커다란 곤란에 빠져 있었는데, 수군의 배들이 가능한 해안 가까이 기대어 있었지만 바다의 큰 파도가 많은 배들을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수의 수군이 닻을 내리고 쉬고 있을 때, 고구려의 부대가 나타나 선제 공격과 습격을 진행 하였다. 주나후와 강이식의 5만 고구려 수군은 발해에서 교전을 벌였다. 주나후의 군대는 이미 꺽이어, 원기가 크게 손상을 당하고, 고구려에 대패하였다. 수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 전투중에 수군은 90프로의 손실을 입었고, 고구려의 군대는 사상자가 거의 없었다.

“평양왕과 연합한 말갈이 먼저 수의 하북성 군사주둔지를 공격했다.” – 이 구절을 보면 고구려의 국경선을 가늠할 수 있다. 강이식의 군대가 현재의 요동 부근에 있어 하북성의 군사주둔지까지 공격했겠는가? 당시 고구려의 국경선이 난하유역이었기에 하북성의 군사주둔지까지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서곽잡록 과 대동운해 의 기록을 인용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지금은 전하지 않은 서곽잡록 과 대동운해 의 기록을 인용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는 당시 병마원수를 맡고 있던 강이식 장군의 5만 병력이 수나라 군대를 격퇴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채호 선생

강이식은 수군을 시켜 바다에서 군량운반선을 맡아 깨부수고 전군에 명하여 보루를 높이 쌓은 채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수군은 군량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는 데다, 6월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역질로 사망자가 늘었다. 어쩔 수 없어 군사를 퇴각시키자, 강이식을 이들을 유슈 가로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자 기계를 얻어 개선했다 – 조선상고사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강이식이 한말은 유명하다. “이 같은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 강이식 장군이 칼로써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이로써 강이식 에 역사는 중국에 치욕에 역사요 무슨일이 있어도 감춰야 하는 역사인것이다. 그럼 강이식 할아버지가 원래 계셨던 위치 그리고 중국인들이 거기에다가 어떻게 했는지 한번 보자.

강이식 장군의 묘는 무순시와 남잡목진 사이에 있다. 1958년에 준공된 대화방수고 대형저수지에 수장이 안된게 신기하다.

강이식 장군의 묘는 고려영자촌의 동북방 쪽 밭 언덕에 있다. 빨간 점의 위치쯤에 해당한다. 고려촌의 하단부 촐로변에 옛 원수림역이 있었던 모양이다. 장작림의 원수림은 그림 하단부 위치에 있다.

고려영자촌 마을입구: 왼편에 ‘고려’와 ‘원수림’ 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본래 고려인들의 마을로 수백년 내려왔다고 한다. 고려영자촌 마을 안에 들어서자, 노인들이 모여서 밥과 술을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거북좌대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붙이니 그들 모두 강이식 장군과의 관련성을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이 지역 일대가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강이식 장군의 묘가 있어서 원수림 이라고 불러져 왔다고 한다. 원수림의 림은 무덤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고. 낙양 관림(관우)와 곡부 공림(공자)에 비견되는 원수림이라는 묘명이 고구려 시대 이후 1400여년 전해져 왔던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장작림 의 묘가 인근에 조성되면서 원수림 이란 명칭을 없엤고 이후 강이식 장군의 비석을 파헤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원수림이라고 하면 모든 중국인들이 장작림의 원수림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수나라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의 영웅 강이식 장군의 봉분을 중국에서 그대로 놔둘리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길로 2킬로미터 정도 더 걸어가야 한다. 주변에 사는 안내인 없이는 찾기가 불가능 한 곳이다.

비석은 사라지고 틀만 남아 있다.

역사는 승자에 것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 만 보아도 중국이 승자 한국이 패자 인것을 알수가 있다. 보여줘도 못 믿는게 한국인 이다. 하지만 나라도 내 자식들에게는 제대로된 역사교육을 가르치고 싶다는 작은 소망으로 이 에세이를 적어본다.

https://m.blog.naver.com/gnbone/22134448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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